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텔 델루나/등장인물 (문단 편집) ==== 김선비 ==== || [[파일:delluna03.png|width=100%]] || || {{{#000000,#e5e5e5 '''40대 후반 (2019년)'''}}} || || {{{#cea963 '''배역명 / 배우'''}}} || || {{{+1 '''{{{#000000,#e5e5e5 김선비}}}'''}}} {{{#000000,#e5e5e5 /}}} {{{+1 {{{#000000,#e5e5e5 [[신정근|{{{#000000,#e5e5e5 신정근}}}]]}}}}}} || 호텔 델루나의 라운지 바 '[ruby(취생몽, ruby=醉生夢)]'[* 취하여 생을 꿈꾸다는 뜻.]의 바텐더로, 본명은 [ruby(김시익, ruby=金時翼)].[* '시대의 날개'라는 뜻.] 500년을 일한 최장 근무자이자 [[선비]] 출신으로, 과거 장원급제까지 한 선비였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발전한 시대에 빠르게 적응한 [[장만월]], 최서희, 지현중과는 달리 내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시대의 풍모를 고집하는 면이 있다. 사인은 장원 급제 이후 고향으로 금의 환향하던 도중 모종의 이유로 급사.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나 4화에서의 언급을 보면 김선비 또한 최서희나 지현중과 같이 무언가 강한 미련이 있기 때문에 델루나에 남아있다. 점잖은 행동거지와는 달리 평소 [[장만월]]에게 시달린 게 많은지 돌아서면 그녀의 뒷담화를 깐다. 9화에서 운전 면허가 없어 [[장만월]]의 차를 운전하지 못해 타박을 듣고,[* 만월 : 아니, 500년 동안 운전도 하나 안 배우고 뭐 했어? / 김선비 : 귀신이 허세로 차 끌고 다니는 댁이 이상한 거요!] 사장이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싫어함에도 눈치 없이 계속해 학 대가리라고 모욕적인 별명을 듣는다.[* 이사한 호텔로 아직 짐이 다 도착하지 않아 당장 [[장만월]]이 즐겨 마시는 샴페인을 마실 수 없게 된다. 김선비는 옛날에 마시던 막걸리를 맛보자고 말해 [[장만월]]의 심기를 거스른다. 처음엔 아까 당부한 말을 까먹는다는 의미로 붕어라 구박 당하니까 자신은 고고한 '학'이라면 몰라도 붕어에 비유 되는 걸 거부한다. 그러자 [[장만월]] 曰: 학 대가리나 붕어 대가리나.] 10화에 [[장만월]]이 [[구찬성]]을 좋아하는 것을 모르고 왕 회장이 구찬성을 손녀 사위 감으로 삼으려 하니 눈치 없이 그것을 도와주려 한다. 15화에서는 김선비의 죽음에 대한 내막이 밝혀진다. 최근에 죽어서 델루나에 온 한 소설 작가가 취생몽에서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유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조선 시대 선비에 대한 내용으로, 그 선비는 장원 급제를 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김 선비도 비슷한 처지였으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작가가 그 선비는 상스러운 소설을 쓴 죄로 장원 급제가 취소되었고 선비들에게 몰매를 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 선비의 이름이 거창하기 그지 없었다며 시대의 날개, "김시익"이라고 말한다. 그 소설가가 내려 던 책 제목은 <음란서생 김선비>라고. 이 사연을 듣던 김선비는 술을 따르던 손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자신의 사연이었던 것이다. 마지막화에서 김선비 죽음의 내막이 더욱 자세하게 나온다. 어린 나이에 소과에 급제하여 신동이라 불렸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낙방하여 40이 넘도록 장시간 수험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장터에서 사람 사는 걸 구경하는 것이었으며, 그를 토대로 소설을 여러 편 썼다. 그 작품들이 현대에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작품인 [[흥부전]], [[심청전]], [[춘향전]]이다.[* 김시익을 지탄하고자 찾아간 유생들이 던지는 책을 보면 흥부전은 연씨형제전, 춘향전은 남원열녀전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장원 급제를 한 이후 이 소설들 때문에 다른 유생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듣고[* 특히 춘향전의 성애 묘사 부분이 김선비가 쓴 거라면 조선 선비들에겐 야설이나 다름없는 것도 맞다. 그리고 흥부전을 보고 형제애를 파괴하는 작품이란 비난을 받았는데, 원본엔 권선징악만 다뤘고 마지막에 흥부가 놀부 가족을 자기 집에 데려오는 내용은 후에 추가된 내용인 모양.], 유생들의 집단 상소로 인해 장원급제는 취소되었다. 장원급제는 당시 득세하던 유력한 [[훈구파]]의 [[금수저|아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김선비의 아버지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사망했으며 김선비도 다시 시험을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객사하게 되었다. 억울하게 죽은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음란서생이란 또 다른 불명예까지 뒤집어 써야 할 상황이 되자 소설 출판을 막으려고 출판사 편집장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편집장은 오히려 '귀신 봤으니 대박'이라고 직원들과 함께 좋아한다. 다행스럽게도 구찬성과 [[장만월]]이 원고를 회수해온다. 원고를 다 읽어본 구찬성이 이 소설을 그냥 폐기하는 것보다는, 소설의 주인공이 상당히 매력 있는 인물이며, 음란한 글을 썼다는 부분만 제외해서 출판하면 김선비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한다. 이 제안대로 내용을 바꾸고 제목을 <학의 노래>로 바꾸어서 출판하였고, 이것이 팔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김 선비는 500년만의 한을 풀게 된다.[* 증거가 모두 사라져서 역사로 김선비의 진실을 밝히는 건 불가능했지만 소설로 쓴다면 세상에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다.][* 이와 별개로 훈구와 사림의 대립 속에서 중도를 지키고, 한 달에 한번 고향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는 로맨티시스트였다고 한다. 소설가가 접한 왜곡된 사료 속에서도 이건 기록으로 제대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치를 씻고 한을 풀게 된 김선비는 델루나의 식구들에게 마지막 술을 대접한 뒤 호텔 식구들 중 가장 먼저 저승으로 떠난다. 이후에 환생해서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아저씨로 나왔다. 김선비의 과거 성정에 대해서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조선이 꽉 막힌 사회라 [[한글|언문]]으로 시문을 쓰면 천것들이나 쓰는 글자를 쓴다고 비웃을 양반은 있을지 몰라도 그 언문을 창제한 게 [[세종대왕|선대왕]]이기 때문에 매장까지 할 수는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정창손]]이 세종에게 '사람이 성인이 되는 건 자질 때문이지 책자가 아닌데 무식한 백성들한테 [[훈민정음|새 글자]]로 삼강행실을 쉽게 풀어줘 봐야 소용있겠냐' 라고 반대의견을 냈다가 누구나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교의 기본정신과 세종의 백성을 위한 노력을 모두 폄하한 탓에 '쓰잘데기 없는 선비'라는 욕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삭탈관직 당했다.] 당장 [[정철]]도 언문으로 가사를 여럿 남겼고, [[김만중]]은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한글 소설인 [[구운몽]]을 지었다. 소설을 쓴 것 역시 당시에는 크게 욕먹을 짓은 아니었으며 되려 양반가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당장 문체반정이 일어나기 20년 전에 정조의 여동생인 [[청연공주|청연]], [[청선공주|청선]] 두 공주와 4명의 궁녀(그 중 하나가 훗날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가 함께 [[곽장양문록|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이라는 장편 소설을 쓸 정도였다. 단, 이건 조선 후기의 일이고, 김선비가 살던 시대는 조선에선 아직 소설 창작이 보편화 되기 이전이다.] 그 중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이 이런 유행의 선두주자였으며 그가 쓴 [[열하일기]]는 베스트셀러 급의 인기를 끌고 있었고 [[삼국지연의]]의 경우는 [[선조(조선)|선조]]가 신하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언급되었을 정도고[*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고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 것 등을 까는 내용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즐겨 읽기도 했다.[* 다만 김선비가 살던 조선 중기는 소설쓰는 것이 그리 보편적인 건 아니었고, 박지원은 조선 후기에서도 파격적인 경우라, 고루한 사림의 눈에 시문도 아닌 소설쓰기가 난잡해보일 수는 있다.] 본격적으로 양반가와 유생들 사이에서 소설을 읽는 것이 금기시 된 것은 김선비보다 더 후대의 [[정조(조선)|정조]] 시기에 기사순정(其辭醇正), 비변귀정(丕變歸正) 등으로 불리던 [[문체반정]] 때부터였다.[* [[김조순]]이 숙직하며 후배와 연애소설을 돌려보다가 정조에게 걸려 반성문까지 낸 일이 있었다.] 때문에 김선비가 유생들로부터 비난 받은 이유는 언문이나 소설이라는 것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너무 파격적이고 과감한 문체로 서술한 게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시익의 급제가 취소되고 훈구파 유력 자제가 장원이 되었다는 것을 보자면 먼지털이식 모함이었을 수도 있다. 큰 흠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탈탈 털어 망신을 줘서 자리에서 털어버리려는 핑계로 김시익의 글을 문제 삼았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